성경 본문
룻기 1장 1~9, 16~18절; 2장 1~3, 8~12절; 4장 13~17절
룻기 1:1–9 (NKSV)
1 사사 시대에 그 땅에 기근이 든 일이 있었다. 그 때에 유다 베들레헴 태생의 한 남자가, 모압 지방으로 가서 임시로 살려고,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길을 떠났다.
2 그 남자의 이름은 엘리멜렉이고,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이며,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다. 그들은 유다 베들레헴 태생으로서, 에브랏 가문 사람인데, 모압 지방으로 건너가 거기에서 살았다.
3 그러다가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두 아들만 남았다.
4 두 아들은 다 모압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한 여자의 이름은 룻이고, 또 한 여자의 이름은 오르바였다. 그들은 거기서 십 년쯤 살았다.
5 그러다가 아들 말론과 기룐이 죽으니, 나오미는 남편에 이어 두 아들마저 잃고, 홀로 남았다.
6 모압 지방에서 사는 동안에, 나오미는 주님께서 백성을 돌보셔서 고향에 풍년이 들게 하셨다는 말을 듣고, 두 며느리와 함께 모압 지방을 떠날 채비를 차렸다.
7 나오미가 살던 곳을 떠날 때에, 두 며느리도 함께 떠났다. 그들은 유다 땅으로 돌아가려고 길을 나섰다.
8 길을 가다가,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제각기 친정으로 돌아가거라. 너희가, 죽은 너희의 남편들과 나를 한결같이 사랑하여 주었으니, 주님께서도 너희에게 그렇게 해주시기를 빈다.
9 너희가 각각 새 남편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도록, 주님께서 돌보아 주시기를 바란다.” 나오미가 작별하려고 그들에게 입을 맞추니, 며느리들이 큰소리로 울면서
룻기 1:16–18 (NKSV)
16 그러자 룻이 대답하였다. “나더러, 어머님 곁을 떠나라거나, 어머님을 뒤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는 강요하지 마십시오. 어머님이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님이 머무르시는 곳에 나도 머무르겠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내 겨레이고, 어머님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
17 어머님이 숨을 거두시는 곳에서 나도 죽고, 그 곳에 나도 묻히겠습니다. 죽음이 어머님과 나를 떼어놓기 전에 내가 어머님을 떠난다면, 주님께서 나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더 내리신다 하여도 달게 받겠습니다.”
18 나오미는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마음먹은 것을 보고,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룻기 2:1–3 (NKSV)
1 나오미에게는 남편 쪽으로 친족이 한 사람 있었다. 그는 엘리멜렉과 집안간으로서, 재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이름은 보아스이다.
2 어느 날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말하였다. “밭에 나가 볼까 합니다. 혹시 나에게 잘 대하여 주는 사람을 만나면, 그를 따라다니면서 떨어진 이삭을 주울까 합니다.” 나오미가 룻에게 대답하였다. “그래, 나가 보아라.”
3 그리하여 룻은 밭으로 나가서, 곡식 거두는 일꾼들을 따라다니며 이삭을 주웠다. 그가 간 곳은 우연히도, 엘리멜렉과 집안간인 보아스의 밭이었다.
룻기 2:8–12 (NKSV)
8 보아스가 룻에게 말하였다. “여보시오, 새댁,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으시오. 이삭을 주우려고 다른 밭으로 가지 마시오. 여기를 떠나지 말고, 우리 밭에서 일하는 여자들을 바싹 따라다니도록 하시오.
9 우리 일꾼들이 곡식을 거두는 밭에서 눈길을 돌리지 말고, 여자들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이삭을 줍도록 하시오. 젊은 남자 일꾼들에게는 댁을 건드리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두겠소. 목이 마르거든 주저하지 말고 물단지에 가서, 젊은 남자 일꾼들이 길어다가 둔 물을 마시도록 하시오.”
10 그러자 룻은 엎드려 이마를 땅에 대고 절을 하면서, 보아스에게 말하였다. “저는 한낱 이방 여자일 뿐인데, 어찌하여 저같은 것을 이렇게까지 잘 보살피시고 생각하여 주십니까?”
11 보아스가 룻에게 대답하였다. “남편을 잃은 뒤에 댁이 시어머니에게 어떻게 하였는지를, 자세히 들어서 다 알고 있소. 댁은 친정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고, 태어난 땅을 떠나서, 엊그제까지만 해도 알지 못하던 다른 백성에게로 오지 않았소?
12 댁이 한 일은 주님께서 갚아 주실 것이오. 이제 댁이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날개 밑으로 보호를 받으러 왔으니, 그분께서 댁에게 넉넉히 갚아 주실 것이오.”
룻기 4:13–17 (NKSV)
13 보아스는 룻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 여인이 자기 아내가 되자, 그는 그 여인과 동침하였다. 주님께서 그 여인을 보살피시니,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14 그러자 이웃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말하였다. “주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이 집에 자손을 주셔서, 대가 끊어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에서 늘 기리어지기를 바랍니다.
15 시어머니를 사랑하는 며느리, 아들 일곱보다도 더 나은 며느리가 아기를 낳아 주었으니, 그 아기가 그대에게 생기를 되찾아 줄 것이며, 늘그막에 그대를 돌보아 줄 것입니다.”
16 나오미가 그 아기를 받아 자기 품에 안고 어머니 노릇을 하였다.
17 이웃 여인들이 그 아기에게 이름을 지어 주면서 “나오미가 아들을 보았다!” 하고 환호하였다. 그들은 그 아기의 이름을 오벳이라고 하였다. 그가 바로 이새의 아버지요, 다윗의 할아버지이다.
포인트: 하나님은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에게 변함없는 사랑과 과분한 친절을 베푸신다.
독특한 시작
룻기 기자는 시간적 배경으로 내러티브를 시작한다. 이것은 내러티브의 발단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וַיְהִי בִּימֵי שְׁפֹט הַשֹּׁטִים; 와예히 비메 셰포트 하쇼페팀; 1절)”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는 직역하면 “이제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였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문장의 첫 단어 “와예히”(וַיְהִי)는 히브리 내러티브에서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전형적인 표지”(typical marker)이다. 그런데 한글개역개정에는 아예 번역되어 있지 않다. 왜냐하면 이 단어는 직역하면 “그리고 … 였다”의 의미로서 히브리 내러티브에만 나타나는 독특한 표현인데다가 번역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와예히”(וַיְהִי)는 단순히 내러티브의 시작을 알릴 뿐 아니라 앞의 어떤 스토리와의 연속성을 알리고 있기에 매우 중요한 표현이다. “와예히”(וַיְהִי)의 첫 음절의 자음인 와우(w)는 “연속의 접속사”로서 앞에 선행하는 어떤 스토리나 내러티브가 있음을 전제하면서 그 스토리나 내러티브의 흐름을 연속시키는 기능이 있다. 앞의 스토리와의 연속을 알린다는 점에서 “와예히”(וַיְהִי)가 전체 스토리 안의 작은 에피소드를 시작할 때도 사용되는 것은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와예히”(וַיְהִי)가 심지어는 한 책의 맨 앞 서두에 나오는 것은 처음에는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서, 그리고 에스더서 같은 역사서 내러티브의 첫 머리에 이 표현이 나온다. 게다가 에스겔서, 요나서 같은 선지서 내리티브를 여는 표현으로 사용된다. 그러므로 성경 기자는 이 표현을 통해 심지어 독립적인 책으로 보이는 스토리도 독자적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지시하고 있다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룻기 역시 “와예히”(וַיְהִי)로 시작하고 있기에 독립적으로 읽도록 의도된 책이 아님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룻기는 여호수아–사사기로부터 이어지는 역사서의 연속 내러티브로 들려지도록 의도된 역사 이야기인 것이다. 그리고 다시 사무엘서로 연속되도록 만들어진 대하 구속 드라마의 일부분인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 기자는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서의 서두에 모두 “와예히”(וַיְהִי)가 등장하도록 하여 연속되는 스토리로 읽도록 독자들에게 지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룻기는 독자적으로 읽혀서는 안 되며 구약 성경의 일부로 더 나아가서는 구약과 신약으로 이루어진 정경(canon) 전체의 문맥을 염두에 두고 읽혀야 한다.
김지찬, 룻기,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본문주해에서 설교까지, ed. 구자섭와/과이은정, 1판 ed (서울: 생명의말씀사, 2018), 77–79.
베냐민 지파의 멸망할 뻔한 이야기 그리고 엘리멜렉 집안의 멸망할 뻔한 이야기
베냐민 지파의 살아남은 청년들이나 나오미나 살 길을 열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에게 살 길이 열렸다. 은혜가 주어졌다. 이것은 그저 사람이 베푼 은혜인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은혜인가?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시기에 사람에게 구원을 베풀길 원하시고 구원을 베푸신다. 그러나 그 방식은 그 사람이 원했던 것과 꼭 같진 않을 수 있다. 오히려 같지 않은 경우가 많다.
하나님께 간구하지 않고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을 행한 것이 별로 보이지 않았으나 은혜가 임한 베냐민 지파나 나오미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도 돌보실 것이라는 소망이 생긴다.
우리가 일상해서 해야 할 노력은 하나님께 나타나 주세요 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기 위해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아가려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