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민수기 21장 4~9절; 요한복음 3장 14~15절; 고린도후서 5장 20~21절
민수기 21:4–9 (NKSV)
4 그들은 에돔 땅을 돌아서 가려고, 호르 산에서부터 홍해 길을 따라 나아갔다. 길을 걷는 동안에 백성들은 마음이 몹시 조급하였다.
5 그래서 백성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였다. “어찌하여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왔습니까? 이 광야에서 우리를 죽이려고 합니까? 먹을 것도 없습니다. 마실 것도 없습니다. 이 보잘것없는 음식은 이제 진저리가 납니다.”
6 그러자 주님께서 백성들에게 불뱀을 보내셨다. 그것들이 사람을 무니, 이스라엘 백성이 많이 죽었다.
7 백성이 모세에게 와서 간구하였다. “주님과 어른을 원망함으로써 우리가 죄를 지었습니다. 이 뱀이 우리에게서 물러가게 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모세가 백성들을 살려 달라고 기도하였다.
8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불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사람은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 것이다.”
9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로 뱀을 만들어서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에, 물린 사람은 구리로 만든 그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
요한복음 3:14–15 (NKSV)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
15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5:20–21 (NKSV)
20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시켜서 여러분에게 권고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리하여 간청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화해하십시오.
21 하나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분에게 우리 대신으로 죄를 씌우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포인트: 놋뱀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처벌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의미한다.
느후스단
왕하 18:4, 개역개정) 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2Kg 18:4, NRSV) He removed the high places, broke down the pillars, and cut down the sacred pole. He broke in pieces the bronze serpent that Moses had made, for until those days the people of Israel had made offerings to it; it was called Nehushtan.
A.열왕기하 18장에는 유다왕 히스기야가 우상들을 파쉐할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섬겼던 “느후스단(Nehushtan)”을 함께 부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느후수단”은 구리/놋쇠을 뜻하는 히브리어 “네후세츠(Nechosheth)”에서 유래한 말로, 구리/놋쇠로 만들어진 것(a thing of brass)를 뜻합니다. 민수기 21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원망하자 하나님께서 불뱀을 보내어 이스라엘을 심판하셨습니다. 이에 모세가 백성을 위해 기도하자하나님께서는 불뱀을 만들어 장대위에 매달고, 뱀에 물린 자마다 그것을 바라보면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말씀대로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달았고, 이것을 바라 본 사람들은 뱀에 물리고도 죽지 않았습니다.
민수기 21장의 핵심은 놋뱀이 특별한 힘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곧 뱀에 물렸어도 놋뱀을 바라보는 자는 살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한 사람들이 구원을 얻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놋뱀에 마치 특별한 힘이 있는 것처럼 그앞에서 분향을 했었고, 히스기야는 우상 숭배의 하나로서 그 놋뱀을 부서뜨렸습니다.
불뱀
1. 불뱀(fiery serpent)
불뱀(שָׂרָף[사라프])은 광야 지역에 많이 서식하는 독사 가운데 한 종류로, 등에 ‘불타는 듯한 붉은 반점’이 있는 뱀입니다(민 21:6, 민 21:8, 신 8:15). 이 뱀은 아주 빠르게 공격하기 때문에 ‘나는 불뱀(the fiery flying serpent)’으로 불리기도 합니다(사 14:29).
* 불뱀이라는 칭호가 붙은 것은 뱀에 물리게 되면 그 강력한 독성으로 인해 온몸에 높은 열이 생기며 ‘불타는 듯한 고통’으로 죽어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수도 있습니다(Keil).
2. 뿔 달린 뱀(horned serpent)
뿔 달린 뱀(שְׁפִיפֹן[쉐피폰])은 ‘뿔 달린 살무사horned viper’를 가리키는데, 희고 검은 반점이 있는 모래 색깔의 뱀[cerastes]입니다(창 49:17). 이 뱀은 독이 강하여 물리면 치명적입니다.
3. 코브라(cobra) 혹은 살무사(viper)
구약성경 신명기 32장 33절에 나오는 ‘독사’는 히브리어 ‘페텐(פֶּתֶן)’인데, 아마도 ‘코브라'(NKJV, NASV, NIV)나 ‘살무사'(DBY)인 듯합니다(욥 20:14 ; 욥 20:16 ; 시 58:4 ; 91:13 ; 사 11:8).
촬영지 : 요르단 느보산의 모세기념교회
인자도 들려야
민수기 :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두라 (직역)
요한복음 : 그리하여 모위세스가 광야 안에서 뱀을 높게 했던 것과 같이, 이와 같이 높게 되어야 하는 중이다 인자(人子,사람의 아들)도, 그이 안에서 믿고 있는 이인 모든 이가 영원한 생명을 갖고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직역)
G5312 ὑψόω
휩소오 hupsoo-높이다 exalt, 올리다 raise.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a)
동사 휩소오(Hippocr. 이래로)는 성경 밖의 헬라어에서 후기에 드물게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들어올리다, 높이 올리다, 높이다, 올리다’를 의미하며, 문자적 의미와 전이된 의미로 사용되었다(참조: G. Bertram).(b)
높임이나 오름에 대해 바벨론의 창조 서사시에서 승리한 마르둑이 신들의 회합에서 세상을 다스리는 주권자의 지위에 오르게 된 내용이 나온다.
애굽에서 신-왕의 대관식 예식 때에 사용되었던 왕 신화(주전 14세기)에서 바로왕 투트모세(Thut-mose) 3세가 태양신 레(Re)에 의해 스스로 빛의 영역에까지 높여져서 거기에서 즉위하여 신의 아들로 임명되었다는 내용이 있다.(참조: ANET)
바벨론의 아다파(Adapa) 신화에서 아다파는 애써 하늘에 까지 도달했으나 그곳에서 생명의 양식을 얻지 못한 사람이었다. 이 계획은 신들의 인과응보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곧 이 신들은 인간을 그에게 지정된 한계 속으로 몰아넣었다.
에타나(Etana) 신화에서 에타나는 자기 신세를 입은 독수리를 따라 하늘에 있는 아쉬탈 보좌에 도달하려는 헛된 노력을 했다. 그의 목적은 죽음 없는 불멸을 성취하는 것이었다.
이 두 신화들에는 인간 자신의 노력을 통해 높아지려는 시도가 포함되어 있는데 반해, 바벨론 창조 신화와 애굽 왕 신화에서 높임은 신들의 일이다.
(참조: D. Muller).
2. 70인역본의 용법(a)
휩소오는 70인역본에서 약 150회 나오며, 16개의 히브리어 단어들의 역어로 사용되었는데, 주로 룸과 그 파생어들(찬양, 칭찬, 높음, 거만함 등)을 번역하고 있다(94회). ‘높다, 높이다, 일어나다’를 의미한다.(b)
따라서 휩소오는 ‘높이다'(시 18:46; 시 27:5,6; 출 15:2; 겔 28:2 등), ‘높다'(시 89:13;시 61:2), ‘넓게 펼치다'(사 14:26), ‘소리를 높이다'(사 37:23), ‘자라다'(겔 31:4,10), ‘양육하다, 기르다'(사 23:4), ‘아름답다'(사 4:2; 시 89:16), ‘높이다, 칭찬하다, 찬양하다'(시107:32; 118:28), ‘자랑하다, 건방진, 거만한'(시 37:20; 시 131:1,2; 겔 28:5)는 의미로 사용되었다.(c)
휩소오는 주로 하나님께서 높이심을 받으시는 것, 하나님에 의해 높임을 받는 것, 무례하게, 거만하게 자기를 높이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휩소오는 신약성경에서 20회 나온다.(a)
행 13:17의 바울의 연설문에서 휩소오는 ‘크게 만들다’를 의미한다: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b)
휩소오는 낮추는 것에 대조되어 나타난다. 예수님은 공관복음서에서 자기 낮춤과 자기 높임에 관하여 말씀하신다(마 23:12; 눅 18:14; 눅 14:11; 눅 1:52; 마 11:23; 눅 10:15). 이 말씀의 배후에는 구약성경의 유대적인 사상이 있다(겔 21:26). ‘하나님의 구약 계시에 따르면 인간편에서 모든 높아짐은 거부된다. 참으로 높아지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시는 것이다'(Bertram 608).
이와 같은 맥락을 따르는 약 4:10과 벧전 5:6의 권고문에는 하나님(혹은 그의 손)께 복종하여 미래의 영광 때에 높임을 받으라고 기독교인들을 경고하는 내용이 있다. 약 4: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벧전 5: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휩소오는 고후 11:7에서 좀 다른 의미에서 낮춤과 함께 사용되었다:”내가 너희를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함으로 죄를 지었느냐”. 고린도 교인들의 높아짐은 그들이(값없이) 복음을 받는 한편 바울은 그의 무보수의 전도로 자신을 낮추었다는 사실로 되어 있다.(c)
휩소오는 기독론에서 특별한 의미, 즉 예수님을 통치자의 지위로 높이는 승귀를 나타낸다(행 2:33; 행 5:31). 최초의 기독론적 언명들은 분명히 예수님의 부활과 높임을 동시에 고찰하고 있는 것 같다. 이 구절들에서 예수님의 부활과 주로 임명 받으신 것이 높임으로 묘사된다(참조: 2:36). 이 구절들이 사도행전1장에 나오는 승천에 관한 누가 신학과는 다른 것을 강조하고 있음을 시사해주므로 여기에서 우리가 다루고 있는 것은 보다 초기의 전통임에 틀림없다. 이 전통에 의하면, 부활절 사건은 구원에 있어서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그 사건 속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주요 그리스도로 임명 받았기 때문이다. 곧 높여졌기 때문이다(행 2:36). 예수님의 높임은 기름부음을 받으심에서의 하나님의 활동의 완성이자 교회와 세계를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주권의 시작이요 계속이자 예기된 성취를 뜻한다.(d)
휩소오는 요한복음에서 5회 나오는데, 명백한 신학적 의미를 나타낸다. 이 5개 구절의 실례 모두에서 휩소오는 이중적 의미, 곧 예수님이 십자가에 들려 올리워진 것은 동시에 그의 (천국으로의) 승귀를 의미한다는 것을 나타낸다(요 3:14; 요 8:28; 요 12:32: 요 12:34). 이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그의 순종의 최종적인 귀결이자 목표라고 보는 요한의 견해에 기초하여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은 세상의 입장에서 볼 때, 그의 목적이 십자가에 들어 올리어진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님을 의미한다. 그들은 ‘그분을 십자가에 들어올림으로써’ 그들 스스로가 그를 자기네의 심판자로 삼은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들어올림’의 이중적인 의미는 명백하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음으로써 그를 들어 올렸다. 그렇지만 엄격히 말해서 그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그는 인자로서 하늘의 영광으로 들어올려졌다. 그들이 예수님을 심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에 그는 그들의 심판자가 된다(Bultmann). 반대로 신자들은 죽음에까지 이른 예수님의 순종 가운데에서 아버지와 그의 완전히 하나됨을 인식하고, 이렇게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심이 아들로 영광을 받게 하고 되돌아옴이요 신자들을 위한 구속이 됨을 깨닫는다(요 12:32). 그러므로 십자가에 들어 올리워짐은 아버지의 영광 속으로의 높임의 시작이다. 높임에 대한 요한의 가르침은 공관복음서에 나와 있는 승천의 실제적인 묘사에 대해 요한이 제시한 것(counterpart)이다.
(참조: G. Bertram; D. Muller; G. Ludemann).
놋뱀 사건의 의미
신명기 8:3 (NKRV)
3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너를 비천하게 하시며(괴롭히시며) 너를 굶주리게 하시며 네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는 것을 먹게 하신 것은 사람이 음식 때문에 살 수 있다고 가르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야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것으로 사람이 사는 것임을 가르치기 위함이다. 사람이 살고자 한다면, 야훼의 입을 집중해서 보아야 하며 그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궁핍과 고난을 경험케 하심은 그 궁핍과 고난의 끝에 보상이 있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 아니다. 그 상황의 해결 후에 보상을 베푸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 가운데서 돌보시고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분으로부터 나를 어디로 인도하시고 어떻게 이 상황을 견디어 가고 극복하기 원하시는지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고난 후에 나를 챙겨 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난 가운데 나를 돌보시길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