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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고향에서 거절당하심

본문 : 누가복음 4:14–30 (NKS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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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을 입고 갈릴리로 돌아오셨다. 예수의 소문이 사방의 온 지역에 두루 퍼졌다.
15 그는 유대 사람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셨으며, 모든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셨다.
16 예수께서는, 자기가 자라나신 나사렛에 오셔서, 늘 하시던 대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는 성경을 읽으려고 일어서서
17 예언자 이사야의 두루마리를 건네 받아서, 그것을 펴시어, 이런 말씀이 있는 데를 찾으셨다.
18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19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20 예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서, 시중드는 사람에게 되돌려주시고, 앉으셨다. 회당에 있는 모든 사람의 눈은 예수께로 쏠렸다.
21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
22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그 은혜로운 말씀에 놀라서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23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내게다 끌어대면서, ‘우리가 들은 대로 당신이 가버나움에서 했다는 모든 일을, 여기 당신의 고향에서도 해보시오’ 하고 말하려고 한다.”
24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무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25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 시대에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서 온 땅에 기근이 심했을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들이 많이 있었지만,
26 하나님이 엘리야를 그 많은 과부 가운데서 다른 아무에게도 보내지 않으시고, 오직 시돈에 있는 사렙다 마을의 한 과부에게만 보내셨다.
27 또 예언자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 나병환자가 많이 있었지만, 그들 가운데서 아무도 고침을 받지 못하고, 오직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이 고침을 받았다.”
28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서, 모두 화가 잔뜩 났다.
29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를 동네 밖으로 내쫓았다. 그들의 동네가 산 위에 있으므로, 그들은 예수를 산 벼랑까지 끌고 가서, 거기에서 밀쳐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30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떠나가셨다.

포인트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종종 거절과 반대에 부딪히곤 한다.


예수님의 근거지, 가버나움으로 이동

누가복음 4:31 (NKRV)
갈릴리의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마태복음 4:13 (NKRV)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누가복음 4:14–30의 사건으로 인해 예수님이 근거지를 가버나움으로 이동하신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은 “고직 이 일 때문에, 거주지를 아예 옮기셨다고?” 라고 평가할만한 사건인가, 아니면 “이런 일이 있었다면 거주지를 옮기셨을만 하네.” 라고 평가할 수 있는 사건인가?


부정적 증인 VS 긍정적 증인

누가복음 4:22 (NKRV)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마르튀레오)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증인의 증언은 학습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증언은 목격을 바탕으로 한다. 기독교적인 울타리 안에서 장시간 생활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독교의 신에 대해 증인이 될 것이다. 동일한 것을 목격했어도,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부정적 증인이 되거나 긍정적 증인이 된다. 예수를 메시야로 여겼던 사람들은 예수의 어린 시절을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운 존재로 성장해 간 시절로 추억하겠으나, 예수를 그렇게 보지 않았던 동네 사람들은 예수의 어린 시절을 별반 특출난 것 없던 동네 아이가 평범한 일상을 보냈던 것으로 기억할 것이다.
“우리 동네에서 자란 예수가 메시야라고?” 나사렛 동네 사람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기 어려워, 마음에 예수가 메시야로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주길 바랐다. 그러나 예수님은 증명 요구를 단호히 거부하신다. 현재도 신의 존재를 신이 나에게 직접 증명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게 신이 자신의 눈 앞에 나타날 것을 명령하지만, 정작 신이 눈 앞에 나타나면 존재적 압도감과 존재적 차이로 인해 오히려 신을 나에게서 떠났으면 하는 바라는 모습을 우리는 출애굽하여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난 이스라엘 민족과 물고기 잡이 중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의 반응에서 볼 수 있다.


나사렛 예수

복음서와 사도행전은 예수가 “나사렛 사람”(Ναζωραῖος, 나조라이오스; 마 2:23; 26:71; 눅 18:37; 요 18:7; 19:19; 행 2:22; 3:6; 4:10; 6:14; 22:8; 26:9;Ναζαρηνός, 나자레노스; 막 1:24; 10:47; 14:67; 16:6; 눅 4:34; 24:19)로 알려졌다고 보고한다. 이 용어가 예수의 고향인 나사렛을 의미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마태복음 2:23의 성취 공식—”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Ναζωραῖος κληθήσετα, 나조라이오스 클레데세타)—은 히브리 성경의 해당하는 출처 본문이 없기 때문에 신약학자들을 오랫동안 당혹스럽게 했다. 여기서 마태가 한 명의 선지자(예: 마 1:22; 2:15, 17)가 아닌 “선지자들”에게 호소하기 때문에, 그는 이 진술을 직접적인 성경 인용이 아닌 다른 것으로 이해했다.
하나의 해석 이론은 이사야 11:1(MT)의 “가지”(נֵצֶר, 네체르)에 빗댈 수 있는 “나사렛” 이라는 단어의 언어 유희를 상상한다(Luz, Matthew 1–7, 150; Keener, Matthew, 114). 이것은 마태복음의 시작에서 두드러진 다윗의 성취라는 주제에 들어맞는다. 또한 이사야 11:1–10은 다른 신약 저자(롬 15:12; 계 5:5; 22:16) 및 초기 기독교 사상가(예: Justin Martyr, Dialogue with Trypho 126.1)에게 중요한 해석 본문이었으며, 다른 초기 유대인 무리들에서 메시아적으로 해석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예: 1QH 6:15; 7:19; 8:6, 8:10). 이 해결책은 (적어도 일부) 마태의 청중이 “나사렛의”라는 말을 듣거나 읽을 때 세 자음으로 된 히브리어 어근을 인식할 수 있을 만큼 히브리어를 잘 알고 있어야 한다.
혹은, “나사렛의”라는 명칭은 “나실인”(ναζιραῖος, 나지라이오스; 삿 13:5, 7; 16:17; 마카베오상 3:49 LXX)과의 관련성을 유발하도록 의도되었을 것이다. 두 용어의 발음이 비슷했기 때문에, 이 이론은 그리스어에서 히브리어로의 비약을 요구하지 않는다. 더욱이, 복음서 이전의 전통은 칠십인역의 “하나님의 나실인”(ναζιραῖος θεοῦ, 나지라이오스 테우) 및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ἅγιος θεοῦ, 하기오스 테우; 참고. 막 1:24; 눅 4:34; 아마도 요 6:69) 사이의 음운학적 유사성과 의미론적 동등성을 이용했을 수 있다. 누가의 탄생 이야기는 사무엘상 2장의 나실인 사무엘의 그것과 상당한 유사점을 공유한다. 데이비스와 앨리슨의 진술에 따르면, “비록 예수가 금욕자가 아닌 존재로서 나실인이 되기 위한 구약성경의 요구사항을 거의 충족시키지 않았지만, 그의 추종자들이 어느 정도 그러한 관점에서 그를 생각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결국 예수는 하나님을 섬기고, 성령의 담지자이고,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로 드려졌다”(Davies and Allison, Matthew, 1:276). 마태는 이사야 4:3에 대한 암시를 의도해서, “그들은 거룩한 자라고 불릴 것이다”(ἅγιοι κληθήσονται, 하기오이 클레테손타이)라는 칠십인역의 문구가 “그는 나실인이라고 불릴 것이다”(ναζιραῖος κληθήσεται, 나지라이오스 클레테세타이)가 되었고, 그런 다음에 “나실인”은 “나사렛 사람”이 되었다(Brown, Birth, 223–225; 또한 Davies and Allison, Matthew, 1:277). 이 해결책은 복잡하지만, 예수가 성취할 예언적 인용문을 제공하는 유일한 해결책이다. 이러한 창의적이고 복잡한 주해를 실행하는 것은 신약성경의 저자를 넘어서는 것이 아니었으며(예: 요 3:14), 마태는 다양하게 성경을 관련시키는 이사야 4:3의 능력에 감사했을 것이다.

Ian W.K. Koiter, “나사렛”, ed. John D. Barry, Lexham 성경사전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20). 발췌

마태 이사야 11:1을 인용한 것이라면, 마태복음의 원본은 히브리어로 작성되었을 것이라는 의견은 더 힘을 받을 것이다.

11. 고향에서 거절당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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