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출애굽기 19장 1~6절; 20장 1~11절
포인트: 처음 네 계명은 자기 백성의 삶 속에서 우선이 되고자 하는 하나님의 열망을 반영한다.
출애굽기 19:1–6 (NKSV)
1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뒤 셋째 달 초하룻날, 바로 그 날 그들은 시내 광야에 이르렀다.
2 그들은 르비딤을 떠나서, 시내 광야에 이르러, 광야에다 장막을 쳤다. 이스라엘이 그 곳 산 아래에 장막을 친 다음에,
3 모세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 가니, 주님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서 말씀하셨다. “너는 야곱 가문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렇게 일러주어라.
4 ‘너희는 내가 이집트 사람에게 한 일을 보았고, 또 어미독수리가 그 날개로 새끼를 업어 나르듯이,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나에게로 데려온 것도 보았다.
5 이제 너희가 정말로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준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가운데서 나의 보물이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다 나의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선택한 백성이 되고,
6 너희의 나라는 나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너희는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주어라.”
출애굽기 20:1–11 (NKSV)
1 이 모든 말씀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다.
2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3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한다.
4 너희는 너희가 섬기려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서 우상을 만들지 못한다.
5 너희는 그것들에게 절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 나, 주 너희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그 죄값으로, 본인뿐만 아니라 삼사 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린다.
6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수천 대 자손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
7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주는 자기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를 죄 없다고 하지 않는다.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지켜라.
9 너희는 엿새 동안 모든 일을 힘써 하여라.
10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희 하나님의 안식일이니, 너희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너희나, 너희의 아들이나 딸이나, 너희의 남종이나 여종만이 아니라, 너희 집짐승이나, 너희의 집에 머무르는 나그네라도, 일을 해서는 안 된다.
11 내가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 주가 안식일을 복 주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다.
십계명 세어보기
성경의 대다수 내용 및 서구 문화의 기저에 자리하고 있는 유대-기독교적 세계관에서 항구적이라고 할 수 있는 요소 중 하나로 십계명(Decalogue, Ten Commandments)을 꼽을 수 있다. 십계명을 암송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대개의 사람들은 (찰턴 헤스턴이 연기한 고전 영화 «십계»의 주인공으로 기억되는) 모세가 경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두 돌판에 하나님의 불꽃 같은 손가락이 십계명을 새기는 장면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십계명의 항목이 말할 필요도 없이 언제나 일치했을 거라고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그건 아니다.
역사적으로도, 유대인과 기독교인은 (그리고 심지어 기독교 내 여러 교파에서조차) 십계명의 정확한 목록과 기술 방식에 대해 서로 의견을 달리해 왔다. 실제로 십계명을 어떻게 기술하는가에 관한 문제는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당시 중요한 고려 사항이 되기도 했다. 그 견해 차이는 모세가 시내 산에서 최초로 받았던 십계명 목록인 출애굽기 20:2–17의 첫 여섯 구절과 마지막 두 구절에 기록된 계명의 개수와 관련된 것이다.
십계명의 목록과 기술 방식에서 서로 견해 차이를 드러내는 그 이면에 어떤 사고가 자리하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한 가지 사항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계명을 어떤 방식으로 나열하든 그 목록의 총 개수는 열 개여야 한다는 점이다. 성경의 다른 세 본문에서 그 계명의 개수를 총 열 개로 확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출애굽기 34:28, 신명기 4:13, 그리고 신명기 10:4의 각 본문은 하나님이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아세레트 하드바림’(“열 개의 말씀”; “열 개의 진술”)을 주셨다고 분명히 말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출애굽기 20:2(비교. 신 5:6)의 진술에는 명령조의 분위기가 전혀 없는데도, 유대인들의 전통은 이 구절의 진술을 명령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 내용을 언급할 때, 구약의 히브리어 본문이 ‘아세레트 하미츠봇’(“열 개의 계명”) 대신 ‘아세레트 하드바림’(“열 개의 말씀”)이란 표현만을 사용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출애굽기 20:2을 열 개 가운데 첫 번째 “말씀”으로 간주한 후에, 3–6절은 그 논지상 단일한 금지사항(우상 숭배 금지)으로 이해한 것이다.
사실 단일한 내용으로 묶인 이 3–6절 안에는 세 개의 명령조의 진술이 들어 있다(“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너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너는]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그러나 이 모두를 각각 별도의 명령으로 간주하면 계명의 총합이 열 개를 초과하게 된다.
출애굽기 20장에 대한 기독교의 견해는 히브리 용어 ‘아세레트 하드바림’(“열 개의 말씀”)에 그 근거를 두고 있지 않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 체계에서는 첫 구절을 십계명의 첫 번째 항목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 결과, 출애굽기 20:2–6 본문 전체가 하나의 출발점으로 간주되었고, 명령조의 진술(너는 ~하지 말라)은 오늘날 널리 통용되는 “계명”이란 용어로 불리게 되었다.
로마 가톨릭, 영국 국교회, 그리고 루터교회에 의해 받아들여진 번호 매김 방식은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들이 이 방식을 선호하긴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의 번호 매김 자체를 불변의 교리처럼 다루지는 않는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제2066항은 “십계명의 분류와 번호 매김은 역사의 흐름에 따라 변해 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개혁주의 전통의 개신교와 그리스 정교회 역시 1절이 하나의 명령이란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3절을 4–6절과는 별도로 구분해 각각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으로 간주한다. 다만 이런 견해 역시 불변의 교리처럼 받아들이는 입장은 아니다.
마지막 두 구절(16, 17절)도 십계명의 번호 매김과 그 내용 기술에 있어 의견을 달리하는 또다른 중요 대목이다. 로마 가톨릭, 영국 국교회, 그리고 루터교회는 열 개의 목록으로 맞추기 위해 출애굽기 20:17을 두 계명으로 분리하는데, 그들에게 이것은 출애굽기 20:2–6을 첫 계명으로 보는 데 따르는 필연적 관점이었다. 이러한 분리는 다소 의아한 면이 있다. 17절의 내용 전체가 사람의 집과 소유에 관한 하나의 주제를 말하기 때문이다. 앞서 십계명 서두의 진술들을 하나의 주제로 묶어서 다룬 것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십계명의 서두는 하나의 주제처럼 묶어서 다루고 십계명의 마지막은 서로 다른 주제처럼 분리해 다루는 방식은 일관성이 떨어진다. 십계명을 열 가지 항목으로 어떻게든 분류하고자 일부러 애쓴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십계명의 분류와 번호 매김에 대한 의견 불일치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유대인과 기독교인 양쪽 모두에게 십계명이 유대-기독교 윤리의 도덕적 핵심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십계명의 항목을 계수하는 방법에 대한 확신이 다소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우리의 동료 인간을 향한 존중심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것에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마이클 하이저, 건너 뛰지 않고 성경 읽기, trans. 김태형, 초판. (서울: 좋은씨앗, 2022), 45–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