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출애굽기 17장 1~7절; 고린도전서 10장 1~6절
포인트 : 하나님의 선하심은 자기 백성을 향한 끝없는 은혜를 통해 표현된다.
출애굽기 17:1–7 (NKSV)
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은 신 광야를 떠나서, 주님의 명령대로 진을 옮겨 가면서 이동하였다. 그들은 르비딤에 진을 쳤는데, 거기에는 백성이 마실 물이 없었다.
2 백성이 모세에게 마실 물을 달라고 대들었다. 이에 모세가 “당신들은 어찌하여 나에게 대드십니까? 어찌하여 주님을 시험하십니까?” 하고 책망하였다.
3 그러나 거기에 있는 백성은 몹시 목이 말라서, 모세를 원망하며, 모세가 왜 그들을 이집트에서 데려왔느냐고, 그들과 그들의 자식들과 그들이 먹이는 집짐승들을 목말라 죽게 할 작정이냐고 하면서 대들었다.
4 모세가 주님께 부르짖었다. “이 백성을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들은 지금이라도 곧 저를 돌로 쳐서 죽이려고 합니다.”
5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이 백성보다 앞서서 가거라. 그리고 나일 강을 친 그 지팡이를 손에 들고 가거라.
6 이제 내가 저기 호렙 산 바위 위에서 너의 앞에 서겠으니, 너는 그 바위를 쳐라. 그러면 거기에서 이 백성이 마실 물이 터져 나올 것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이 시키신 대로 하였다.
7 이스라엘 자손이 거기에서 주님께 대들었다고 해서, 사람들은 그 곳의 이름을 므리바라고도 하고, 또 거기에서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가, 안 계시는가?” 하면서 주님을 시험하였다고 해서, 그 곳의 이름을 맛사라고도 한다.
고린도전서 10:1–6 (NKSV)
1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이 사실을 알기를 바랍니다. 우리 조상들은 모두 구름의 보호 아래 있었고, 바다 가운데를 지나갔습니다.
2 이렇게 그들은 모두 구름과 바다 속에서 세례를 받아 모세에게 속하게 되었습니다.
3 그들은 모두 똑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고,
4 모두 똑같은 신령한 물을 마셨습니다. 그들은 자기들과 동행하는 신령한 바위에서 물을 마신 것입니다. 그 바위는 그리스도였습니다.
5 그러나 그들의 대다수를 하나님께서는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6 이런 일들은, 우리 조상들이 악을 좋아한 것과 같이 우리가 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신명기 6:10–25 (NKSV)
10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당신들에게 주기로 약속하신 그 땅에, 당신들을 이끌어들이실 것입니다. 거기에는 당신들이 세우지 않은 크고 아름다운 성읍들이 있고,
11 당신들이 채우지 않았지만 온갖 좋은 것으로 가득 찬 집이 있고, 당신들이 파지 않았지만 이미 파놓은 우물이 있고, 당신들이 심지 않았지만 이미 가꾸어 놓은 포도원과 올리브 밭이 있으니, 당신들은 거기에서 마음껏 먹게 될 것입니다.
12 당신들이 그렇게 될 때에, 당신들은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당신들을 이끌어 내신 주님을 잊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13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만 맹세하십시오.
14 당신들은, 당신들 가까이에 있는 백성이 섬기는 신들 가운데에, 그 어떤 신도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15 당신들 가운데 계시는 주 당신들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분노하시면, 당신들을 땅 위에서 멸하실 것입니다.
16 당신들이 맛사에서 시험한 것처럼,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시험하면 안 됩니다.
17 주 당신들의 하나님의 명령과 그가 명한 훈령과 규례를 철저히 지켜야 합니다.
18 당신들은 주님께서 보시는 앞에서 올바르고 선한 일을 하십시오. 그러면 당신들이 잘 되고, 주님께서 당신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신 저 좋은 땅에 들어가서, 그 곳을 차지하게 될 것이며,
19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당신들 앞에서 당신들의 모든 원수를 쫓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20 나중에 당신들의 자녀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명하신 훈령과 규례와 법도가 무엇이냐고 당신들에게 묻거든,
21 당신들은 자녀에게 이렇게 일러주십시오. ‘옛적에 우리는 이집트에서 바로의 노예로 있었으나, 주님께서 강한 손으로 우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다.
22 그 때에 주님께서는 우리가 보는 데서, 놀라운 기적과 기이한 일로 이집트의 바로와 그의 온 집안을 치셨다.
23 주님께서는 우리를 거기에서 이끌어 내시고, 우리의 조상에게 맹세하신 대로, 이 땅으로 우리를 데려오시고, 이 땅을 우리에게 주셨다.
24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명하여 지키게 하시고, 주 우리의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셨다. 우리가 그렇게만 하면, 오늘처럼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를 지키시고, 우리가 잘 살게 하여 주실 것이다.
25 우리가 주 우리의 하나님 앞에서, 그가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충실하게 지키면, 그것이 우리의 의로움이 될 것이다.’ ”
시편 95
하나님께 예배합시다
(사람에게 하는 말)
1 자, 여러분은 기뻐 외치세요, 여호와께!
즐거이 소리치세요, 우리 구원의 바위이신 여호와께!
2 우리, 여호와의 얼굴 앞에 나섭시다, 감사드리면서.
찬송하면서 즐거이 소리 지르십시다, 여호와께.
3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고,
모든 신들 위에 크신 임금님이시니까요.
4 땅의 깊은 곳들이 여호와의 손안에 있고,
산의 높은 곳들이 여호와의 것이지요.
5 바다도 여호와의 것이고 여호와가 친히 만드셨지요.
마른땅도 여호와의 손으로 빚으셨지요.
6 오세요. 우리, 엎드려 ⁕예배하십시다.
무릎 꿇읍시다, 우리를 만드신 여호와 앞에.
7 여호와는 우리 하나님이시니까요.
우리는 여호와의 목장의 백성이고
여호와 손의 양 떼이니까요.|
⁕⁕오늘이라도 여호와의 목소리를 여러분이 듣는다면!
(하나님의 말씀)
8 “너희의 마음을 닫지 마라, 므리바에서처럼,
광야의 맛사 시절처럼!
9 거기서 나를 시험했어, 너희 조상들이.
나를 떠보았어, 내가 한 일들을 보고서도.
10 40년 동안 내가 그 세대를 아주 싫어하여 말했지.
‘그들은 마음이 빗나간 백성이야.
그들은 알지 못해, 나의 길들을!’
11 ⁕그래서 내가 굳게 다짐했어, 화가 났거든.
‘그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할 것이야,
내가 마련해 둔 쉼터로는!’”
르비딤에서의 두 사건
- 하나님을 공격한 이스라엘 민족
- 이스라엘 민족을 공격한 아말렉 족속
이스라엘과 아말렉의 악연
아말렉 족속은 아브라함의 때에 최초로 언급된 족속입니다(창세기 14:7). 그들이 비록 창세기 10장의 나라 이름들 중에 언급되어 있진 않지만 민수기 24:20에서 “민족들의 으뜸”이라고 불렸습니다. 창세기23장에서는 아말렉의 후손, 엘리바스의 아들 및 에서의 손자를 아말렉 족속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12, 16절). 아말렉 족속은 에돔인들과 관련은 있으나 다릅니다.
성경에 의하면 아말렉 족속과 이스라엘 족속은 오랜 기간 동안 반목하였고 하나님께서 이 땅에 거주하고 있는 아말렉 족속을 멸절하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출애굽기17:8-13; 사무엘상15:2; 신명기25:17).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들에게 한 족속을 완전히 멸절하라고 하신 이유를 설명하기는 매우 어렵지만 역사를 들여다 보면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많은 사막 부족들처럼 아말렉 족속은 유목 민족이었습니다. 민수기 13:29 에 의하면 애굽과 가나안 사이에 위치한 사막지대인 네게브에 거주하는 민족들이었습니다. 바빌론은 그들을 수트(Sute)라고 부르고 이집트인들은 그들을 시티우(Sittiu)라 불렀으며 아마르나 문서에는 카바티(Khabbati), 즉 “약탈자”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아말렉의 가차없는 만행은 르비딤을 공격하면서 시작됩니다(출애굽기17:8-13). 또한, 신명기 25:17 -18에서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곧 그들이 너를 길에서 만나 네가 피곤할 때에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사방에 있는 모든 적군으로부터 네게 안식을 주실 때에 너는 천하에서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라 너는 잊지 말지니라”.
아말렉 족속은 이후 호르마에서 가나안 족속과 손잡고 이스라엘을 공격합니다(민수기14:45). 사사기에서는 아말렉이 모압(사사기 3:13) 및 미디안과 (사사기6:3) 연합하여 이스라엘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킵니다. 이와 같이 아말렉은 지속적으로 이스라엘의 땅과 식량 공급을 파괴시켰습니다.
사무엘상 15:2-3에서 하나님께서는 사울 왕에게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로 내가 그들을 벌하노니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사울 왕은 먼저 이스라엘의 친구인 겐 사람들에게 함께 멸하여 지지 않도록 그 땅을 떠나라고 합니다. 그 후 아말렉 족속을 공격했는데, 받은 임무를 완수하지 않습니다. 사울은 아각을 살리고 자신과 군대를 위해 좋은 것들을 취하고 그렇게 한 이유에 대해서도 거짓을 말합니다. 사울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한 것이 너무나 심각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를 버리시어 더 이상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사무엘상 15:23).
그때 탈출한 아말렉 족속은 이스라엘 민족의 후손들을 수백 년간 괴롭히고 약탈합니다. 사무엘상 30장은 다윗이 소유한 유대 마을인 시글락을 침노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말렉은 그 마을을 불사르고 다윗의 두 아내를 포함하여 모든 여인들과 아이들을 잡아갔습니다.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아말렉을 공격하여 모두 도로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중 몇백 명의 아말렉 족속이 도망하였습니다. 그 후 시간이 많이 흐른 뒤, 히즈기야 왕 때에 시므온 자손들이 세일 산에 가서 살아남은 아말렉 자손들을 쳤습니다(역대상 4:42-43).
아말렉 족속이 마지막으로 언급된 것은 에스더에서 아말렉 아각 왕의 자손인 아각인 하만이 아하수에로 왕의 명으로 페르시아의 유대인들을 전멸시킬 것을 공모하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페르시아의 유대인들을 구해주시고 오히려 하만과 그의 아들들과 나머지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죽이셨습니다(에스더9:5-10).
유대인들을 향한 아말렉 족속의 증오와 하나님의 사람들을 죽이려는 반복적인 시도가 오히려 자신들을 파멸로 이끌었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계획을 훼방놓거나 하나님께서 축복한 이들을 저주하는 모든 이들의 운명이 어떻게 되는 지를 알 수 있습니다(창세기 12:3).
https://www.gotquestions.org/Korean/Korean-Amalekites.html
‘맛사’ 사건의 문제는 무엇일까?
‘맛사’ 사건은 하나님을 배신한 대표적인 사건으로 신명기에 적힌 모세의 설교에서 언급된다.
폴 틸리히는 본인의 저서, ‘믿음의 역동성’에서 굳거한 믿음은 의심의 과정을 거친 후에 세워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출애굽기 17장과 신명기 6장에서 하나님은 ‘의심’을 용납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폴 틸리히는 ‘불확실성’으로 비롯되는 의심은 믿음이 다져지기 전에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이며, 그 ‘불확실성’을 용기로 뚫고 나아갈 때 믿음이 형성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믿음 = 사실’이라고 여기는 것을 옳지 않다고 한다. 이러한 믿음의 형성 과정은 그 믿음의 대상에 대해 관심이 있을 때 진행되기 때문에, 결국 무엇에 대해 믿음이 있다는 말은 그 것에 대해 관심이 있다는 말이다.
‘맛사’ 사건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의심하지 말라는 결론을 도출하는 것은 과연 바른 이해일까?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의심하지 말라고 한다면, 의심하면 하나님께 벌 받는다고 한다면, 숨이 턱 막히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감기’처럼 ‘의심’이라는 것은 어느 순간, 내 뜻과 상관 없이 찾아오기도 하는데, 의심을 그냥 강하게 거부함으로 밀어내기면 하면 되는 것일까?
아말렉의 갑작스런 공격에 대해 왜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을까? 물이 없는 것은 천천히 죽어갈 일이지만, 누군가의 약탈 공격을 받는 것은 생명에 직접적인 위해를 받는 일이다.
‘맛사’ 사건 때, 이스라엘 민족을 선동하는 무리가 있었을 것이다. 우리 또한 목숨이 걸린 위기 상황에는 오히려 우왕좌왕하면서도, 손해 볼 일이 있을 때, 선동하는 무리에 동조하면서 누군가에게 책임질 것을 종용하고 목소리를 높일 때가 있다. 바로 그러한 일들이 ‘맛사’ 사건 때 일어났을 것이다. 아말렉의 약탈 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그 급박함에 누군가에게 원인이 있다고 따지는 선동가가 나설 수 있는 자리가 없었을 것이다. 피해를 보는 사람마다 도망치고, 간절한 마음으로 구원을 바라기에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상한 선동’에 대해 거부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상한 선동’을 거부할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God is no where. / God is now here.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면, ‘맛사’ 사건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이스라엘 민족은 ‘잘 되는 나’에 관심을 더 가진 듯하다. 내가 잘 되지 않으니까, 바로 비난의 대상을 찾고 이 문제를 해결하라고 윽박지른다. 나는 잘 되어야 하며, 인도자는 나의 잘됨을 마땅히 보장해야 한다고 믿고 있는 듯하다. 나의 잘됨에 관심을 두었기에 그런 믿음이 생겼을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인도자인 하나님이나 모세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우리를 인도하는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하려 하지 않는다. 광야의 이 여정을 치러내는 의미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
모세를 선택해서 이집트의 밖으로 나가면 자유도 얻고 복을 받을 것으로 잔뜩 기대했는데,
내가 무엇에 관심을 두고 있는가에 따라 이상한 선동을 거부할 수 있다.
신의 뜻을 파악해 보려고 했던 사람이라면, “모세가 우리를 죽이려고 물 없는 광야로 우리를 들여 놓았다. 이곳에 신은 없다.” 라고 외치는 선동가의 소리에, ‘신이 일부러 우리를 죽이겠다고 물 없는 광야로 이집트에서부터 그 놀라운 기적들을 펼치며 우리를 인도해 냈다고? 이게 말이 되는 소리야? 모세한테 우리를 죽이려 하냐고 달려들 것이 아니라, 물이 없으니 이 상황을 해결해 달라고 모세에게 그냥 요청하면 될 일 아닌가?’ 라고 판단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도 ‘천국’을 ‘내가 복을 누리는 곳’으로만 관심을 갖고 본다면, 우리가 받는 복이 부족하다고 느낄 때 하나님께 쉽게 대들 수 있다. 우리가 ‘천국’을 ‘하나님과 같이 있는 곳’으로 관심을 갖고 본다면, 우리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에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의지할 것이다.